아는 건 별로 없지만 가족입니다 (My Unfamiliar Family, 2020)
아는 건 별로 없지만 가족입니다 (My Unfamiliar Family, 2020)
너무너무 좋았는데 어떤 점이 좋았는지 써두지 않으면 휘발될 것 같아 써두는 가족입니다의 좋은 점(감상)
모든 주요 캐릭터가 뚜렷한 개성과 성격과 서사를 가지고 있다. 작은 역할을 가진 캐릭터마저 단순한 도구캐가 아닌 각자 처해진 상황에서 자기 마음대로 살아움직이면서 이야기를 진행시키는 지점이 좋았다.
그리고 뚜렷한 개성을 가진 각각의 캐릭터는 어느 누구와 만나느냐에 따라 각기 다른 말투와 모습을 보인다. 엄마 앞의 은희는 허허실실 좋은 모습만 보여주는 착한 딸이지만 찬혁 앞에선 자기 치부를 발랑 까보이며 나 오늘 이랬다? 미쳤지. 하소연을 하기도 하고 언니 은주 앞에선 힘든 내색을 보였다가도 움츠려들며 할말을 접기도 한다. 또 동일한 인물들간의 대화도 상황에 따라 다른 양상을 보이기도 한다. 은주와 은희가 그렇듯이.
그리고 또 좋은 점. 캐릭터 하나하나에게 서사를 주고 성장할 수 있도록 돕는다는 지점도 좋았다.
주인공인 은희는 자신이 내던졌던 소중한 사람들과의 관계를 회복하고, 이제껏 주변에 맞춰주기만 했던 자신을 자각하고, 모른 척 옆에 내려놓았던 자신의 꿈과 현실을 직시한다. 현실을 똑바로 바라본 은희는 삶을 대하는 태도를 조금은 바꾸고, 직업적인 측면에서도 본인이 진정으로 원하고 할 수 있는 것을 생각해 장기 계획을 세워 실천에 옮긴다. 따박따박 월급이 나오던 전 회사만큼 안정적이진 않지만 보다 본인이 원하던 삶을 살 수 있도록, 방향을 제대로 잡고 차근차근 걸음을 내딛는다.
은주는 마주하기 힘든 진실들을 알게되면서 무너지지만 자신이 납득할 수 있는 방식으로 사건의 모든 측면을 담담히 알아보고 천천히 받아들인 후 결국엔 억지로 끌어안고 있던 것들을 내려놓고, 자신을 위한 선택지를 골라 다시 일어서 걷는다. 절망적인 상황에서 자신을 절망에 빠뜨린 사람과 관계를 어느 하나 파괴하지 않고 이야기를 진행하는 지점은 지금 생각해도 놀랍고 충격적이다. 점점 더 세게, 심하게, 충격적인 장면들로 화면을 구성하고 자극을 추구하는 드라마 속 세상에서 사기 결혼한 상대와 차분하게 대화를 나누고 생각을 나누고 서로를 위해주는 모습은 다시 생각해도 이질적이지만, 모든 관계가 꼭 사건이 터지자마자 폭발해서 재가 되어버려야 하는 것도 아니고, 휘몰아치는 상황 속에서 아직은 옆에있는 서로를 의지하는 모습이 꼭 그렇게 비현실적인 부분도 아닌 것 같아서, 이럴 수도 있겠구나, 생각하면서 봤다.
지우는, 우리의 아무 걱정 없어보이는 해맑고 귀여운 막내는, 사실은 이렇게 사는 것이 지긋지긋했다. 항상 다른 인물들에 집중해 보다가 후반부에 터진 사건과 지우의 입장을 보고 적잖이 놀랐지만 다른 사람들의 글을 보면서, 그리고 나의 그 시기를 되돌아보면서 충분히 그럴 수 있었겠구나 생각했다. 이대로 평생 뼈 빠지게 열심히 일해서 살아봐야 내 돈으로 내가 살 집 하나 마련할 수 있을지도 불투명하고, 그렇게 아둥바둥 살아봐야 그 종착지가 결국엔 평생 싸우는 모습만 보여온 부모님이라고 생각하면, 이렇게 발버둥치듯 평생 살아가야한다는 게 지긋지긋하고 벌써부터 까마득했을 것 같다.
사람은 상대가 내가 듣고싶은 말을 해줄 때 그게 진실인지 거짓인지와는 상관없이 일단 믿고싶어지는 거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아무리 얼토당토않은 이야기라도 듣고싶었던, 믿고싶었던 말을 해주면 홀랑 넘어가버리는 거라고. 지우도 그렇지 않았을까. 먹고살려고 아둥바둥 일하고 쳇바퀴처럼 돌아가는 일상에서 벗어나 관광지에서 여유롭게 카약이나 타면서, 관광객이 오면 대여해주면서 유유자적 살고싶었을 것 같다. 실제 관광지에서의 삶이 얼마나 고되고 불안정한지는 전혀 고려하지 않은채 그냥, 첫사랑이 이 쳇바퀴를 벗어날 수 있는 동앗줄을 내려준 거라고 믿고싶었던 것 같다. 그렇고 돈도 뜯기고 국제미아가 될 뻔한 경험도 하면서 사실 이 세상에 낙원은 없다는 걸 알게되었겠지. 그리고 그렇게 지우도 한뼘 더 어른이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가족에 대해서도 다시 생각해보게 되었을테고. 다시 생각해도 참 철 없지만, 돌아온 지우를 그저 토닥여줬던 누나들의 심정도 이해가 가는, 미워할 수 없는 캐릭터였던 것 같다.
그리고 이야기의 시작, 파란만장한 경험을 한 이 가족의 아버지 상식씨. 사고를 당하고, 기억을 잃고, 스물 두살로 돌아간 우리의 상식씨. 몰상식하고 거칠게 말하고 불 같이 화를 내는 상식씨는 솔직히 도저히 좋아할 수 없는 사람이었지만, 세상의 떼가 묻고 시기와 오해로 자신을 갉아먹기 전으로 돌아가면서 이 사람의 삶을 전체적으로 돌아보고, 생각의 변화를 그려줌으로서 좀 더 이 캐릭터에게 마음으로 다가갈 수 있었다.
처음엔 잃어버린 기억과의 간극을 좁히려고 고군분투하고, 기억이 돌아온 다음에는 또 그 상황에 적응하느라 고생하고, 그리고 그 과정 속에서 숙이씨와 오랜 기간 대화없이 쌓아왔던 오해를 풀면서 얼핏 상황은 더 파국으로 치닫는 듯 보였지만 결국엔 대화를 통해 관계를 회복한 부분이 인상적이었다. 쌓여있던 기간과 단단해진 오해만큼 격렬한 감정 소모가 있었지만 결국엔 두 사람에게 가장 적합한 관계를 찾아낸 부분이 참 좋았다. 여전히 거칠고 서툴고 자격지심이 심하지만, 그래도 앞으로는 무슨 일이 생기면 대화를 하겠구나. 하는 어떤 믿음이 생겼다.
마지막으로 이야기의 끝을 장식한 우리의 엄마 숙이씨. 숙이씨는 희생의 아이콘이었다. 엄마라는 포지션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그 온화하고 내성적인 성격 때문이었을까. 그냥 숙이씨는 힘이 들고 지쳐도 그 자리에서 버티면서 모두를 위해 가정을 유지하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16화 예고에서 숙이씨가 집을 나갔다는 내용이 나왔을 때 내심 큰일났다! 고 생각했으니까. 조용하다고, 우직하다고 서운한 게 없을 리 없는데. 어떻게 보면 숙이씨가 참고 참고 참다가 마지막에 터진 것도, 어떻게 보면 참 숙이씨 답고 그런 점에서 의미심장한 것 같다. 숙이씨는 폭발하는 것마저도 참고 참고 참다가 하는구나. 15화에서 모든 갈등이 어느 정도 완화되어 안심하는 한편 숙이씨 안에서 작은 균열이 시작해 15화 엔딩에서 팡 터지는 부분은 정말 감탄을 금치 못했다. 상식씨가 화르륵 라이터 같은 사람이라면 숙이씨는 찜통 냄비 같은 사람이니까. 그리고 그렇게 숙이씨가 터진 계기도 믿었던 가족의 서운한 진심이라는 지점도 현실적이었다.
그리고 가장 좋았던 부분은 숙이씨가 훌훌 다 내던지고 집을 나서는 부분이었다. 가장 걱정했던 부분이 본방으로 볼 땐 가장 좋았다. 숙이씨에겐 정말 어려웠지만 마음이 가뿐해지는 선택이었을 것 같다. 가족을 먼저 생각하는 엄마가 아닌, 그냥 이진숙이라는 한 개인을 위한 시간을 처음으로 갖는 숙이씨가, 눈물나게 좋았다. 20대 초반부터 지금까지, 단 한순간도 자신만을 위해 살아본 적이 없었을테니까. 집을 떠나지도 못하고 그럴 생각조차 하지못하고 얽메여있었을 진숙씨가 홀가분하게 걸음이 이끄는대로 걷고 먹고 자고 휴식을 취했을 걸 생각하니 내가 다 행복했다. 그게 다 뭐라고, 사실 애들도 예전에 다 커서 이제 자기 밥벌이도 알아서하는데. 한번 마음 먹기가 어렵지 두번세번은 어렵지 않으니까, 숙이씨가 앞으로도 한번씩 자기만을 위한 시간을 가져 버릇 했으면 좋겠다. 희생이라는 굴레를 벗어던진 진숙씨가 너무, 너무너무 좋았으니까.
이렇듯 모든 주요인물이 각자 성장을 통해 전보다 더 나은 삶을 살게되었다는 지점이 참 좋았다. 그리고 엔딩크레딧에서 감각적인 화면을 통해 배우 뿐 아니라 배우와 함께 일한 스탭들(매니저, 스타일리스트)을 모두 챙기고 드라마 제작진들도 굵직굵직한 주요 보직 뿐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고 놓치기 쉬운 일을 하는 스탭들, 현장의 구석구석을 누비고 조율하지만 정작 눈에 보이지 않는 스탭들이나 현장에는 나가지 않지만 스튜디오에서 드라마의 완성도를 위해 참여하는 스탭들까지 전부 한사람한사람 놓치지않고 엔딩크레딧으로 유의미하게 담아줘서 너무너무너무 좋았다. 매화 감탄하며 봤지만 엔딩에 엔딩크레딧까지 완벽한 드라마는 정말 오랜만이고 보면서 마음이 너무 따뜻했다. 캐릭터 한명 한명을 잘 보듬듯이, 현장의 스탭 한사람 한사람을 모두 동료라고 생각하고 존중해주는 것 같은 엔딩 크레딧 영상에 눈물이 울컥 나왔다. 정말 좋은 드라마였다.